내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된 열여섯 번째 생일은 나의 삶이 새로 시작된 날이다. 당시 나는 스페인 중산층 자녀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다. 좋은 집, 멋진 부모님, 오빠와 두 언니…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행복한 아이였다. 그날도 여느 생일처럼 학교 친구들의 축하와 선물을 받고, 오후에는 클래식기타를 배웠다. 뉴스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항상 잠들기 전 라디오로 세계 곳곳의 소식을 듣는데, 2년 전엔 베를린 장벽의 붕괴소식을 듣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날 밤, 행복한 생일을 보낸 후 잠이 들려는 순간 나는 걸프전이 시작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오늘 밤, 대규모의 폭탄투하로 걸프전이 시작됩니다… 연합군은 거의 10만 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많은 군사기지와 민간시설을 파괴하였습니다”. 그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시 나는 기도하는 방법조차 몰랐지만, 나의 첫 번째 기도를 올렸다. “주님, 이라크나 쿠웨이트에도 오늘 저처럼 생일을 치렀을 소녀가 있습니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행복이나 선물은 없고 소음과 괴로움, 죽음만 있습니다. 오늘 저를 위해 선물을 하나 더 부탁드립니다. 이 지구에 평화를 주시고, 그 아이에게 평화로운 생일을 허락하소서” 잠시 후 나는 평화와 용기를 얻고 마침내 잠들 수 있었다.
열일곱 살 때, 나는 교환학생으로 북아일랜드에서 지내며 또 한 번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아일랜드의 남북분단에 마음이 아팠고, 다시 하나의 아일랜드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이 안타까웠다. 일 년 후 대학과 전공을 결정할 때, 예전 내 기도 속의 이라크 소녀가 떠올랐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무척 좋아했지만, 전쟁지역이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국제기구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통역과 번역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2학년이 되어 런던에 간 나는 그곳에서 열정과 꿈에 가득 찬 대학생활을 누렸다. 콘서트, 친구, 동아리, 오락 등 런던의 화려하고 그럴듯한 일상에 빠졌고, 남자친구까지 있었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듯했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고, 그렇게 서서히 기도와 순수함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던 ‘크랜베리즈’ 밴드의 콘서트 날, 나는 엄청난 경험하게 되었다. 멋진 콘서트가 끝난 후, 우리는 사인을 받기 위해 ‘로열 알버트홀’ 밖에서 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무리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콘서트에 온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몇몇은 술과 마약을 과다복용하여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충격적인 모습은 내 기억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또 울며 이번에는 하느님께 화를 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의사는 지금쯤 그들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말 당신이 사랑이라면, 당신이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날 밤 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런던에 머무르던 그 해, 아주 조금씩 귓속의 속삭임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산들바람처럼, 나는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너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가거라. 나의 젊은이들에게 가서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거라. 그들의 삶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너는 가서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여주거라. 나는 너를 창조하였노라…’
그 당시 유럽의회나 유엔에서 일하고 싶은 나의 꿈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었다. 젊고 행복했으며 멋진 남자친구와 밝은 미래를 꿈꾸던 나에게 하느님의 소명 같은 건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엔 행복과 슬픔, 화려한 삶의 공허함과 진실을 향한 목마름이 뒤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선교단체의 회원이 된 언니의 권유로 런던 근교에서 열리는 청년들을 위한 기도모임과 피정, 미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거기서 진리를 향해 가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가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청빈과 행복, 순수와 진실이 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느님께 나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해, 기도 속에서 하느님은 나의 모든 의문에 답을 주셨다. 세상과 전쟁, 삶과 그 의미, 슬픔과 공허함, 그리고 내 젊음과 미래에 대해서.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말, 나는 일주일 간 영성수련에 참가했다. 그때 나는 생명, 그리고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무언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탈출 3,7)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전하는 탈출기 말씀이지만, 이제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된 것이다.
나의 모든 것, 나의 꿈, 일, 남자친구, 가족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었던 내가 무척 가난하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나의 죄와 잘못을 잘 알고 있었고 그분의 소명을 받아들이기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주님,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 그러자 그분은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분도 나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는 성소를 받아들이고 남을 도울만한 사람은 못된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온전한 종이 되기엔 내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도 중 엄청난 평화를 느꼈고, 성모님의 응답이 내게 전해짐을 깨달았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는 슬픔과 허망함이 나의 마음을 어떻게 두드렸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며 참된 행복과 의미있는 삶으로 이끄셨는지만 기억하면 되었다.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선교사가 된 지도 15년이 넘어 어느새 서른 다섯 살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나의 삶 속에 들어왔고, 나 역시 많은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는 사실을 지금처럼 확신해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만이 우리 삶의 기반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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